기도

복음말씀의 향기 12월 23일 목요일

오점옥 2021. 12. 23. 17:25

(1)
로드아일랜드 바닷가에서 ‘해돋이’를 보았습니다 바다와 구름을 뚫고서 붉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새를 보았습니다. 새끼를 돌보는 사슴도 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의 부모님들이 해 뜨기 전에 부지런히 밭으로 나가서 일을 시작하듯이, 그렇게 새벽을 여는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숙소에서도 해 뜨기 전에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리를 청소하시는 환경미화원, 농산물 시장의 중개인, 동대문 시장의 상인, 첫차를 운전하는 기사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새벽을 힘차게 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5년 전입니다. 음주를 좋아하는 저는 늦은 시간에 잠들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주교님의 권유로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8시면 술자리를 마치고, 10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여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곳 뉴욕에서 신문사의 일과 더불어 부르클린 성당의 일, 퀸즈 성당의 일까지 도울 수 있는 것은 새벽 시간에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새벽을 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사람은 모두 새벽을 여는 것입니다. 선한 목적과 선한 의지로 이웃을 돕는 사람은 모두 새벽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새벽길을 떠났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습니다. 밤 새워 양들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때를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던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했던 사제 즈카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평생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벽을 여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합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열었던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큽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2)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얽혀있는 삶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인류에게 등불이 되었던 종교는 크게 4가지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창시자입니다. 조로아스터, 석가모니, 예수님, 마호메트는 조로아스터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창시자입니다.

두 번째는 경전입니다. 조로아스터교에는 아베스타, 불교에는 불경, 그리스도교에는 성경, 이슬람교에는 꾸란(코란)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회성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회성이 결여된 종교는 유사종교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불의하고 억울한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박해와 순교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현세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삶에 대한 집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하는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과 성찰로 생겨난 종교를 ‘자연종교(自然宗敎)’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하느님께서 보여주신다고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 종교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고 합니다.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종교입니다. 부모가 아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은총으로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자연’을 통해서입니다. 구름, 꽃, 나비, 시냇물, 바람, 햇살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술인들은 자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공감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가집니다. 잘못된 행동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예언자(預言者)’를 통해서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된 길을 갈 때면 바른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과 고통 중에 신음할 때는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매년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대림시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을 통해서 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밤을 새워 양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축하하였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